
무심코 가입했던 저렴한 보험의 배신
몇 년 전인가, 다이렉트 보험이 한창 유행이라길래 핸드폰으로 이것저것 눌러보며 가입했던 암 보험이 하나 있다. 그때는 월 보험료가 몇 만 원이라도 더 아끼는 게 중요했다. 그래서 ‘해지환급금 미지급형’이라는 옵션을 아무 고민 없이 선택했다. 납입 기간 중에 해지하면 돌려받을 돈이 아예 없다는 설명은 읽었지만, 어차피 끝까지 가져갈 생각이었으니까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 같다. 그런데 어제 문득 통장을 정리하다가 이 보험을 유지하는 게 맞나 싶어서 콜센터에 전화를 걸어봤다. 상담원이 아주 차분한 목소리로 말씀하시길, 지금 해지하면 환급금은 0원이라고 했다. 이미 3년 넘게 매달 4만 원씩 꼬박꼬박 냈는데, 한 푼도 못 돌려받는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기분이 좀 묘했다.
보험료가 싼 데에는 다 이유가 있더라
사실 따지고 보면 내가 선택한 결과다. 보험사 입장에서도 해지환급금 미지급형 구조를 통해 보험료를 낮춰준 거니까 당연한 논리일 거다. 최근에 뉴스에서 ABL생명이나 DB손해보험 같은 곳에서 새로운 보험 상품이 나올 때마다 꼭 ‘해지환급금 미지급형’을 강조하는 걸 봤다. 그때는 그게 참 합리적인 선택인 줄 알았다. ‘실속 있는 보장’이라는 단어에 혹했던 거지. 근데 막상 해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번 하게 되니, 이 상품이 가진 ‘비갱신형’이라는 장점보다 ‘중도 해지 시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더 크게 다가왔다. 보험료가 확실히 기본형보다는 저렴한데, 그만큼 내가 보험사에 묶여 있는 셈이라는 걸 이제야 실감했다.
해지를 고민하다 멈춰버린 이유
결국 해지는 안 했다. 3년 동안 낸 돈이 아까워서라기보다는, 지금 당장 이걸 해지하고 다른 곳을 알아보는 게 더 귀찮아졌기 때문이다. 새로 알아본다 해도 결국 비슷한 구조의 다이렉트 보험을 찾게 될 텐데, 굳이 지금 보험을 깨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건강보험 가입할 때 순수보장형이나 만기 환급형 같은 다른 선택지들도 있긴 하지만, 나이가 좀 더 들면 보험료가 오를 텐데 지금 납입하고 있는 이 금액을 유지하는 게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도 들고. 하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은 찜찜하다. 내가 원할 때 언제든 그만둘 수 있는 유연함이 사라졌다는 기분이 들어서다.
매달 빠져나가는 자동이체 알림
매달 15일이면 어김없이 보험료가 빠져나간다. 예전엔 별생각 없었는데, 이제는 이 알림이 올 때마다 ‘아, 내가 또 돈을 넣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마치 넷플릭스 구독료처럼 당연하게 나가는 돈인데, 이건 넷플릭스와 다르게 언제든 해지하면 손해가 너무 크다. 보험이라는 게 원래 미래를 대비하는 거라고 하지만, 가끔은 이게 나를 옭아매는 밧줄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주변 친구들은 종합보험 비교해보라며 이것저것 권하기도 하지만, 이미 하나를 이렇게 묶여버리니 다른 보험을 더 추가하는 것도 겁이 난다.
선택의 책임에 대하여
어쩌면 나는 보험이 아니라 ‘안정감’을 산 게 아니라 ‘불안을 잠재우는 값’을 지불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해지환급금 미지급형 상품들이 최근 더 많이 나오는 걸 보면서, 사람들이 점점 더 싼 보험료에 민감해지고 있구나 싶기도 하고. 나 역시 그 흐름에 맞춰 움직였을 뿐인데, 막상 이런 상황이 닥치니 선택에 따른 책임을 오롯이 느끼게 된다. 다음번에 또 보험을 고민하게 된다면, 그때도 똑같은 결정을 내릴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냥 이대로 계속 내다가 정말로 큰 병이 생겼을 때 보장이라도 제대로 받으면 다행인 걸까. 보험을 해지하지도, 그렇다고 완벽히 만족하지도 못한 채 매달 날짜만 기다리는 이 상황이 꽤나 모호하다.
넷플릭스처럼 묶여있다는 느낌이 확실히 와닿네요. 제가 맡은 보험도 비갱신형이라 그런지, 해지할 때 손해를 더 크게 느껴요.